본문 바로가기

문학과 예술 그리고 산책에서 찾는 비즈니스의 기회/책 , 영화, 음악, 그림 그리고 전시회

(전시) 김은정, 말, 그림(sub, text), 2025. 10. 2. - 11.8., 학고재갤러리

728x90
반응형
김은정
KIM Eun Jeong
말, 그림
sub, text
2025. 10. 2. - 11.8.
김은정 개인전 | 말, 그림
말을 그림으로 표현하는 작가에게 나는 다시 말을 덧붙이는 사람이다. 모호한 장면에 의미를 덧씌우고, 작품과 작품 사이에 존재하는 여백의 시공간을 그럴듯한 서사로 잇는다. '관객'의 이해를 돕기 위해 그림이 존재하는 이유를 성실하게 설명하고, 행여나 그렇게 쏟아져 나온 나의 말이 부유하다 사라질까 봐 흰 종이 위에 검은 글씨로 꼭 붙잡아 둔다. 김은정의 회화에서 줄곧 등장하는 가볍고 임시적인 상태의 요소들, 예컨대 구름, 연기, 녹는 눈, 불꽃이 크고 작은 캔버스 화면 위에 안착한 것과 비슷하달까. 이들은 모두 변화와 순환의 순간을 나타내지만, 결국 그림의 틀 안에 하나의 고정된 장면으로 존재한다. 작가의 말처럼 불확실한 세계 속의 일상적 경험과 몽환적 상상"을 그리는 일은 역설적으로, 그 불확실성에 회화적 확실성, 또는 명확성을 부여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이번 전시의 제목 <말, 그림>을 빗대어 설명하자면, 우리는 쉼표와 띄어쓰기가 만들어낸 틈, 그러니까 "말"과 "그림"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 존재하는 그 사이 공간에 아직도 주목하고 있는 셈이다. 왜일까?
김은정이 그리는 풍경은 현실을 초과하는 허구와 상상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한편으로는 작가가 목격하거나 경험한 구체적인 일상의 단면을 바탕으로 한다는 점에서 허구를 초과하는 현실을 담고 있다고도 할 수 있다. 그가 다루는 매체도 마찬가지다. 판화를 전공하고, 편집 디자이너로도 활동한 작가는 회화를 주된 표현 매체로 삼지만, 여기에 판화의 프레스 기법이나, 이미지 배열과 배치를 통한 편집 구성을 적용하기도 한다. 전통 회화가 가진 시각적 언어나 물성을 초과하는 이러한 작업 방식은 매체의 한계를 인식하고, 그 경계를 고민하는 것에서 비롯한다. 김은정이 참조하는 풍경화 양식도 예외는 아니다. 산천을 답사하고 관찰해 그린 진경산수에서부터 자연에 내면의 풍경을 투사하는 남종화, 그리고 목판의 투박한 선과 화려한 색감이 돋보이는 우키요에에 이르기까지, 그는 특정 양식이 가진 성격을 실험하는 동시에 그것을 넘어서기 위해 다양한 시간대와 문화권의 전통을 조합한다. 같은 맥락에서 김은정은 일상이라는 현실이 가진 한계와 무엇이든 가능해 보이지만 결국 사변적 세계에서만 존재하는 허구의 한계를 끊임없이 타진해 보고 자문자답하며 창작을 이어 나간다: 제한된 범주 안에서 무엇을 드러내고, 무엇을 생략할 것인가?
무한해 보이는 가능성에 상처를 내고, 매끄러운 연속성에 균열을 만들어 내는 틈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 제시하는 경계 때문이라기보다, 그것이 저항하는 단일함 때문이다. 김은정은 하나의 명확한 주제나 서사를 채택하는 대신, 화면 안에 존재하는 주체들 사이의 미세한 간극과 각각의 작품 간에 자리 잡은 생략된 공간을 강조하며 복수(plural)의 의미와 이야기, 장면이 떠오를 수 있도록 한다. 비약하자면, 틈은 전면화된 표면적 의미(text)와 그것을 둘러싼 맥락(context) 사이에 숨은 잠재적 공간(subtext)으로 기능하며, 미처 "말"로 발화되거나 "그림"으로 표현되지 못한 복합적인 생각, 상상, 감정, 느낌 등을 포용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전시는 한계와 가능성을 동시에 나타내는 틈을 중심으로 김은정이 사유하고 실천하는 회화를 마주할 기회를 제공한다.
「쉼표와 띄어쓰기: 틈에 대하여」 중 발췌 | 임수영 (독립기획자, 미술사학자)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