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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 뭉치들. 김해리 (아트인컬처 선임기자)
부풀어 오른 아침 해가 선잠을 가로채지 않도록 커튼을 여민다. 수 시간 뒤 그 도톰한 장막을 열어젖히면 새날이 시작된다. 최수진은 커튼을 걷어 어김없이 떠오른 태양을 피부로 느끼고, 무사히 폐를 들락이는 숨을 확인하며 하루를 맞는다. 그는 매일같이 여닫는 커튼을 ‘페이지’에 비유한다. 아침이 밝으면 커튼을 제쳐 하루를 개시하는 습관이 책의 페이지를 넘겨 다음 이야기를 이어 내려가는 감각에 맞먹는다는 것. 커튼과 페이지, 하루와 이야기, 작가는 책장을 한 장씩 넘기며 읽다 만 문장을 더듬어 찾듯, 눈 불인 새벽 간 가물가물해진 지난날들의 기억을 커튼 사이 쏟아지는 빛으로 흔들어 깨우고 '하루'를 연장해 낸다. ‘공기 페이지’는 눈에 보이지도, 손에 잡히지도, 심지어 정말로 있(었)는 건지도 확실하지 않지만, 머릿속 한 편에 자리 잡은 시간의 뭉치들이다. 최수진은 하루라는 낱장의 종이를 꿰어 일상과 기억의 편집본을 엮어낸다.
그래서 그림 곳곳에는 실제로 그의 주변을 이루는 사물과 동물이 등장한다. 집에서 기르는 화분과 강아지, 연인이 아끼는 기타와 사운드 장치, 산책로에서 우연히 보이곤 하는 두더지와 딱따구리, 옛 화가들의 화집에 그려진 이름 모를 소녀와 괴수, 한때 즐겨 입던 옷가지와 저녁 식탁에 오른 각종 과일까지. 회화와 현실의 '다른 그림 찾기'를 할 수 있을 정도로 작가 삶의 파편이 그림에 펼쳐져 있다. 하지만 그의 회화가 정직한 일기와 같은 '기록'인가, 하면 그렇지 않다. 일상이라고 부르기에는 낭만적이고, 기억이라고 칭하기에도 비현실적이다. 외려 꿈속 한 장면처럼 영 관계없는 찰나들이 아무렇지 않게 뒤섞여 있다. 시간의 혼재가 그림의 저변에 흐른다.
여기서 작가의 시간 의식으로 초점을 옮겨보자. 시간에 대한 관심은 이전 작업들부터 암시돼 왔다. 일명 <제작소> 시리즈(2015~2022)가 대표적이다. 최수진은 색채에 몰두했었다. 화가가 특정 색을 택하는 과정이란 논리로는 설명할 수 없는 직관의 영역이라고 생각했다. 마치 색을 관장하는 절대자가 다음 쓰일 색을 몰래 속닥여 주는 운명적 차원에 가깝다고 여겼다. 그래서 그는 화가의 손에 색이 쥐어지기까지 그것들이 자라나는 무대의 뒤편을 가정했다. 농부가 땀방울로 심고 지은 작물이 음식의 재료가 되듯, 어딘가에는 안료로 성장해 나갈 '색의 농장‘이 있으리라는 상상. 이에 최수진은 무기물로 태어난 총천연색들의 팔자를 뒤집고 이를 의인화해, 생명체로서의 소명을 다하는 노동자로 묘사했다. 달리 말해, 작가는 색들이 살아 움직일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을 내어준 것이다. 그러니 <제작소>시리즈는 색의 탄생 설화라 할 수 있다.
이 연작이 대단원을 내린 건 2023년 무렵이다. 대개 발랄한 여성 인물로 등장했던 색의 화신들이 종적을 감추고 대신 갖가지 일상의 흔적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게다가 물리 세계의 룰을 따르던 환영적 영상이 흐물흐물 녹아내려 서로가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고 있다. 온전한 형태를 가진 대상도 분명히 있지만, 거진붓짉허 직물 패턴이 이곳과 저곳, 이때와 그때의 경제를 허뭉다. 회화 속 시공에 균열이 일어난 것이다. 이제 그림은 특정한 순간이 정지된 상으로 멎어있지 않고 운동성을 지닌 ’과정‘의 양태를 현시한다. 앙리 베르그송이 ’지속으로서의 시간‘이라고 말한, 영원히 ’무엇인가 되어 가는‘ 변화의 한중간이다. 실은 이것이 시간의 진실이지 않은가, 시간이란 아직 존재하지 않는 미래에서, 이미 존재하지 않는 과거로의 이동 경로일 뿐이지만, 그럼에도 시간은 존재를 구성하는 본질적 틀이기도 하다는. 이렇게 작가는 완벽한 의미에서는 불가능한 현실태로서의 시간, 축복이자 저주로서 생에게 부여되는 제1조건으로서의 시간에 접근하고 있다. 이러니, 그가 중종 죽음의 시점에서 과거를 돌아본다는 언급이 이상하지 않다. 인간의 힘으로는 도무지 되돌릴 수 없는 성질을 지닌 시간은 공포와 불안을 내포하기 때문이다.
하나 더, 여기서 최수진은 시간을 과거, 현재, 미래로 이어지는 횡형의 연속으로 보기도 하지만, 지구의 탄생 이래 수십억 번 반복됐을 새벽, 오전, 정오, 오후, 밤 등의 집적이라는 종형을 인식하기도 한다.
<복숭아 향 비가 내리는 오후>가 있다. 여기서 '오후'란 특정한 순간이나 특별한 날이 아니라 인류를 거쳐 간 천문학적 개수의 오후가 뭉쳐진 덩어리이다. 고대의 비 내리는 오후와 어제 본 비 내리는 오후가 만나는 시간이다. 이렇게 작가는 출생 이래로 살아온 개체적 생명의 역사를 넘어, 인간의 DNA에 타고 흐를 생명 전체의 기억이라는 종적 특성까지도 우리 삶에 반영되어 있음을 함축한다. 시간은 종횡으로 ‘상호침투' 한다. 공기 페이지에는 생명의 역동적 시나리오가 쓰여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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